The Carolingian Dawn: The Era of Pepin III
중세유럽역사 - 유럽역사

피핀 3세의 시대: 새로운 유럽 질서의 서막 (3)

제3부 유럽을 재편한 동맹

교황 스테파노 2세의 프랑크 왕국 방문은 서유럽의 권력 지도를 영원히 바꾸어 놓을 역사적인 동맹의 서막이었다. 이 동맹은 생드니에서의 도유식, 이탈리아 원정, 그리고 ‘피핀의 기증’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제7장 생드니에서의 도유식(754): 기독교 군주의 탄생

의식과 그 상징성

754년 여름, 파리 근교의 생드니 대성당에서 거행된 의식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교황 스테파노 2세는 직접 피핀과 그의 아내 베르트라다, 그리고 두 아들 샤를과 카를로만에게 성유를 발랐다. 교황이 직접 집전한 이 두 번째 도유식은 보니파키우스 대주교의 첫 번째 도유식을 넘어서는 권위를 부여했으며, 피핀의 정통성을 국제적인 차원으로 격상시켰다. 더 나아가 교황은 파문(excommunication)의 위협을 가하며 프랑크인들이 피핀의 가문 외에서 왕을 선출하는 것을 영원히 금지했다.  

‘로마인의 파트리키우스’ 칭호

이 의식에서 교황은 피핀과 그의 아들들에게 ‘로마인의 파트리키우스'(Patricius Romanorum)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 칭호는 전통적으로 이탈리아에 주둔한 비잔티움 황제의 최고 대리인인 라벤나 총독이 보유하던 것이었다. 교황이 이 칭호를 피핀에게 부여한 것은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단절하고 로마의 새로운 공식 수호자를 임명하는 행위였다. 이로써 피핀은 교회의 수호자(defensor)라는 공식적인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엇갈린 해석과 미래의 갈등

이 사건은 즉시 상반된 해석을 낳았고, 이는 이후 수 세기 동안 이어질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 교황청의 시각: 도유식을 받아들임으로써, 피핀은 왕을 세우고 폐할 수 있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한 셈이었다. 즉, 모든 세속 권력의 정통성은 교황으로부터 나온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 비잔티움 제국의 시각: 교황에게는 왕을 임명하거나 제국의 칭호를 수여할 어떠한 권리도 없었다. 이는 오직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만이 가진 고유한 권한이었다.  
  • 프랑크 왕국의 시각: 교황은 도움을 구걸하러 온 청원자였다. 강력한 후원자인 피핀은 교황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었다. 실제로 피핀은 교황이 수여한 ‘파트리키우스’ 칭호를 거의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독립성을 과시했다.  

생드니에서의 도유식은 단순한 정치적 동맹을 넘어, 로마의 보편주의(교황으로 대표되는)와 게르만적 왕권(피핀으로 대표되는)이라는 두 가지 이질적인 권력 이론의 융합이었다. 이 융합은 로마-기독교적 제국의 사명을 띤 새로운 형태의 게르만 왕국이라는 혼성적 정치체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의식은 권력의 궁극적인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남겨두었다. 권력이 신으로부터 교황을 거쳐 왕에게 흐르는 것인가, 아니면 신으로부터 왕에게 직접 주어지며 교황은 단지 그 신성함을 확인하는 역할만 하는 것인가? 이 “관계에 내재된 모호함” 은 결함이 아니라, 양측 모두 자신에게 유리할 때 우위를 주장할 수 있도록 만든 장치였다. 따라서 생드니에서의 의식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교황과 황제 사이의 주권 다툼이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낳았다. 이 문제는 이후 중세 성기(High Middle Ages)의 서임권 투쟁 등으로 폭발하며 유럽의 정치 및 지성사를 지배하게 된다. 800년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식을 위한 선례는 바로 이곳에서 마련되었다.  

제8장 프랑크의 이탈리아 원정 (755-756)

퀴에르시에서의 약속 (754)

도유식에 앞서, 피핀은 이탈리아 원정에 미온적이었던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해야 했다. 퀴에르시에서 열린 귀족 회의에서 피핀은 교황에게 랑고바르드족이 점령한 영토를 되찾아주겠다고 공식적으로 약속했다. 훗날 ‘피핀의 기증’으로 알려지게 될 이 약속은 교황의 정통성 부여에 대한 반대급부였다.  

제1차 원정 (755)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신속한 군사 개입이 이루어졌다. 피핀의 군대는 알프스를 넘어 수사(Susa) 근처에서 아이스툴프의 군대를 격파하고 랑고바르드의 수도 파비아(Pavia)를 포위했다. 궁지에 몰린 아이스툴프는 점령지를 반환하겠다는 조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스툴프의 저항과 로마 포위 (756)

그러나 프랑크 군대가 철수하자마자 아이스툴프는 약속을 깨고 3개월 동안 로마를 직접 포위했다. 이 기간 동안 교황 스테파노 2세가 피핀에게 보낸 서신들은 절박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성 베드로의 목소리를 빌려, 군사적 지원의 대가로 피핀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며 구원을 호소했다.  

제2차 원정과 최종 굴복 (756)

피핀은 결정적인 2차 원정으로 화답했다. 그는 다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랑고바르드 군대를 격파했고, 이번에는 조약의 조건이 확실히 이행되도록 조치했다. 아이스툴프는 조공을 바치고 점령했던 도시들을 교황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제9장 피핀의 기증과 ‘성 베드로의 공화국’

‘성 베드로에의 고백’

영토의 이전은 단순한 토지 증여가 아니었다. 반환될 영토 목록을 담은 문서가 작성되었고, 각 도시의 열쇠가 수집되었다. 이 문서와 열쇠들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봉헌되는 장엄한 의식을 통해 전달되었다.  

교황령의 탄생

‘피핀의 기증’은 교황에게 아드리아 해의 라벤나와 펜타폴리스에서 티레니아 해의 로마 공국에 이르는, 이탈리아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띠 모양의 영토를 부여했다. 이 사건은 교황령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교황을 세속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로 만들었다.  

법적 문제와 정치적 함의

이 기증은 법적으로는 의심의 여지가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피핀은 법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에 속한 땅을 기증한 것이었으며,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었다. 이 행위는 중부 이탈리아에서 비잔티움의 권위가 끝났음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었다. 새롭게 탄생한 ‘성 베드로의 공화국’은 프랑크 왕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고, 이는 양측의 동맹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 기증은 훗날 샤를마뉴와 루이 경건왕에 의해 재확인되면서 유럽의 법적 현실로 굳어졌다.  

이 기증은 단기적으로는 랑고바르드의 위협으로부터 교황의 안전과 독립을 확보하는 탁월한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교황을 이탈리아의 세속 정치에 1,100년 동안 얽어매는 결과를 낳았다. 교황이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가 되면서, 그의 영적 사명은 종종 세속 정치의 이해관계에 가려졌고, 이는 전쟁, 정치적 음모, 부패로 이어져 종교개혁과 같은 비판 운동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더욱이, 교황은 이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프랑크 보호자에게 의존해야 했다. 이는 기증이 본래 의도했던 주권을 오히려 약화시키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었다. 결국 ‘피핀의 기증’은 영적 권위를 세속 통치의 부담 및 유혹과 결합시킴으로써 교황청에 장기적인 구조적 문제를 안겨준, 복잡한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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