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arolingian Dawn: The Era of Pepin III
중세유럽역사 - 유럽역사

피핀 3세의 시대: 새로운 유럽 질서의 서막 (2)

제2부 이탈리아의 도가니: 세 강국의 각축

8세기 중반 이탈리아 반도는 랑고바르드, 비잔티움, 교황령이라는 세 세력이 각자의 야망과 생존을 걸고 격돌하는 거대한 도가니였다. 이 삼각관계의 균열 속에서 피핀의 프랑크 왕국은 새로운 균형추로 등장했다.

제4장 랑고바르드족의 야망: 통일 이탈리아 왕국을 향하여

랑고바르드 왕국의 통합

랑고바르드 왕국은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자신들의 지배하에 통일하려는 오랜 숙원을 가지고 있었다. 본래 아리우스파 기독교도였던 그들은 7세기 말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이탈리아-로마 원주민과의 종교적 장벽을 허물었다. 리우트프란드(Liutprand, 712-744)와 같은 강력한 왕들은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하며 자신들을 단순히 ‘랑고바르드족의 왕’이 아닌 ‘이탈리아 전체의 왕’으로 내세웠다.  

아이스툴프 왕(749-756)의 공세

이러한 통일의 야망을 가장 공격적으로 추진한 인물이 바로 아이스툴프 왕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에 남아있던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거점을 제거하기 위해 결정적인 공세를 펼쳤다. 751년, 그는 비잔티움 총독부의 수도였던 라벤나를 함락시키고 황제의 대리인을 축출했다. 이는 200년 이상 지속된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비잔티움 통치에 종지부를 찍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기세가 오른 그는 곧바로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로마 공국을 위협하고 복종을 요구했다.  

데시데리우스 왕(757-774)의 외교술

아이스툴프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데시데리우스는 보다 복잡한 전략을 구사했다. 그는 군사적 압박과 함께 외교와 정략결혼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처음에 교황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으며 , 피핀의 아들 샤를(훗날의 샤를마뉴)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프랑크 왕국과의 동맹을 꾀하기도 했다. 이 혼사는 교황 스테파노 3세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또한 교황 선출에 직접 개입하여 자신의 꼭두각시를 세우려 시도하는 등 로마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이스툴프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772-773년, 그가 다시 로마를 위협하자 이는 결국 샤를마뉴의 이탈리아 침공을 촉발했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종말로 이어졌다.  

제5장 비잔티움의 공백: 성상 파괴 논쟁과 제국의 후퇴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에서 공세를 펼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명목상의 종주국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심각한 내홍이 있었다. 제국은 성상 파괴 논쟁이라는 신학적, 정치적 위기에 휩싸여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성상 파괴 논쟁

이사우리아 왕조의 황제 레오 3세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741-775)는 성상(icon) 숭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이를 금지하는 성상 파괴 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5세는 열렬한 성상 파괴론자로서, 754년 히에리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성상 숭배를 이단으로 선포하고, 성상 옹호론의 중심이었던 수도사들을 격렬하게 박해했다.  

로마와의 신학적 결별

성상 파괴 정책은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교황청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신학적 심연을 만들었다. 교황청은 이 논쟁 기간 내내 성상 숭배를 굳건히 지지했다. 이 갈등은 단순히 신학적 견해 차이를 넘어, 교회의 최고 권위가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한 권력 투쟁이었다. 교황은 황제가 교리를 재단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며 그의 칙령을 거부했다. 769년 로마에서 열린 라테라노 공의회에는 프랑크 사절단까지 참석하여 히에리아 공의회를 공식적으로 규탄했는데, 이는 동서 교회의 분열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탈리아에서의 군사적 무기력

제국이 내부적으로는 종교 분쟁에, 외부적으로는 동부 국경에서 압바스 칼리파국의 위협에 시달리는 동안, 이탈리아에 군사력을 투사하여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 자국 영토를 방어할 능력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751년 라벤나의 함락은 이러한 무기력함의 정점이었다. “로마에 대한 제국의 보호라는 것은 어떤 형태로나마 사라져 버렸다”. 교황 스테파노 2세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비잔티움은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교황의 독립을 촉발하는 이념적 기폭제로 작용했다. 본래 교황의 비잔티움 황제에 대한 정치적 충성은 단일하고 보편적인 기독교 로마 제국이라는 이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성상 파괴라는 ‘이단’ 정책을 채택하자, 교황은 이 정치적 관계를 신학적 관점에서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황제는 이제 멀리 있고 무능한 보호자일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이단자’가 된 것이다. 이 이념적 단절은 교황이 새로운 정치적 파트너를 찾는 행위에 도덕적,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즉, 절박함에서 비롯된 정치적 행위(프랑크족에게 의탁하는 것)를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 의로운 행동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교황청이 757년부터 프랑크 왕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비잔티움인들을 ‘그리스인'(Graecus)이라고 칭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의 ‘로마성’과 로마에 대한 권위를 부정하려는 의도적인 수사적 전략이었다. 결국 성상 파괴 논쟁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수백 년 된 유대를 결정적으로 끊어버렸고, 이탈리아에 생긴 정치적, 이념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교황-프랑크 동맹이 탄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제6장 교황의 선택: 새로운 보호자를 찾아서

위기에 처한 교황

교황 스테파노 2세는 공격적인 랑고바르드족과 이단적이고 무력한 비잔티움 황제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빠졌다. 아이스툴프가 조공과 복종을 요구하며 로마를 직접적으로 위협해오자 , 교황의 외교적 노력과 뇌물 공세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콘스탄티노플에 보낸 구원 요청 역시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알프스를 넘는 도박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교황 스테파노 2세는 753-754년 겨울, 직접 알프스를 넘어 피핀에게 도움을 청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결단을 내린다. 현직 교황이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 왕국을 방문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는 랑고바르드족이 통제하는 길목을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배를 타고 이동했는데, 이는 여정 자체가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보여준다.  

퐁티옹에서의 만남

교황과 왕의 첫 만남은 강력한 상징적 행위들로 가득했다. 피핀은 교황 앞에 엎드려 경의를 표하고, 교황이 탄 말의 고삐를 잡고 이끄는 마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교황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는 겸양의 표시였다. 교황 역시 삼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 베드로와 로마 공화국”을 위해 도움을 간청했다. 이는 교황의 요청을 단순한 정치적 사안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수호하는 성스러운 과업으로 격상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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