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son Kidd
NBA 리그 역사 - NBA

변혁의 여름: 2001년 NBA 오프시즌은 어떻게 새로운 시대를 열었는가 (2)

2부: 지각 변동을 일으킨 트레이드: 포인트가드의 재평가

이 장에서는 2001년 오프시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트레이드, 즉 스타 포인트가드 제이슨 키드와 스테판 마버리의 맞교환을 분석합니다. 이 거래는 즉각적이고 극적인 결과를 낳았으며, 리그 전체에 팀 빌딩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2.1 전제: 동등한 가치의 맞교환이었나?

2001년 7월 18일, 뉴저지 네츠는 스테판 마버리를 피닉스 선즈로 보내고 제이슨 키드를 영입했습니다. 표면적으로 두 선수는 비슷한 가치를 지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2000-01 시즌, 27세의 키드는 평균 16.9점, 9.8어시스트를 기록했고, 23세의 마버리는 평균 23.9점, 7.6어시스트를 기록했습니다. 마버리는 더 젊고 역동적인 득점원이었으며, 더 긴 계약 기간이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선수 모두 각자의 팀에서 문제를 겪고 있었고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네츠는 마버리의 가장 큰 약점이었던 수비력을 보강하기 위해 수비가 뛰어난 키드를 원했습니다.  

이는 두 팀이 각자 영입한 선수가 팀에 더 적합할 것이라고 판단한 전형적인 ‘챌린지 트레이드’였습니다. 당시의 일반적인 평가는 이 트레이드를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이득으로 보지 않았기에, 이후의 결과는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2.2 ‘키드 효과’: 즉각적인 우승 후보 등극과 역할의 재정의

트레이드의 효과는 즉각적이고 엄청났습니다. 마버리와 함께 26승에 그쳤던 네츠는 키드가 합류한 첫 시즌에 52승으로 수직 상승하며 2002년 NBA 파이널에 진출했습니다. 그들은 다음 해에도 파이널에 다시 진출했습니다. 키드의 패스 우선주의, 넓은 시야, 그리고 강력한 수비력은 케년 마틴, 키스 반 혼, 신인 리차드 제퍼슨과 같은 동료들의 잠재력을 폭발시켰습니다. 반면, 키드와 함께 51승을 거두었던 선즈는 부상에 시달린 마버리와 함께 36승으로 추락했습니다.  

이 트레이드는 리그의 선수 평가 방식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했습니다. 마버리는 뛰어난 개인 기록(평균 20점, 8어시스트)을 올렸지만, 그가 속한 팀은 꾸준히 부진했습니다. 반면 키드의 개인 득점은 더 낮았지만, 팀의 승리에 미치는 영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컸습니다. 그의 합류와 네츠 선수단의 건강 회복이 맞물려 완벽한 시너지를 창출한 것입니다. 두 팀의 극명한 성적 대비는 NBA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 기록은 좋지만 팀 성적은 나쁜’ 선수와 팀 전체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진정한 야전사령관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각 구단 프런트는 단순히 기록지를 넘어 리더십, 수비 영향력, 농구 IQ와 같은 무형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포인트가드를 평가하는 기준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2.3 장기적인 파급 효과

이 트레이드는 피닉스에게 단기적으로는 재앙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장기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마버리는 피닉스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뉴욕 닉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선즈가 2004년 스티브 내쉬를 영입하는 데 필요한 샐러리캡 공간을 확보하는 전략의 일부였고, 이는 리그에 또 다른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온 ‘7초 이하(Seven Seconds or Less)’ 시대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이는 단 하나의 트레이드가 수년에 걸쳐 도미노 효과를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선즈에게 치명적인 손실처럼 보였던 결정이, 결국 후속 조치들을 통해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시대를 여는 발판이 된 것입니다.


3부: 세기의 드래프트: 과대평가, 오만, 그리고 숨겨진 보석들

이 장에서는 2001년 NBA 드래프트를 해부합니다. 이 드래프트는 화려한 1순위 지명자의 극적인 실패와, 그늘에 가려져 있던 해외 선수들의 왕조 건설이라는 극명한 대조로 정의됩니다.

3.1 콰미 브라운 실험: 황제의 첫 번째 실패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진 위저즈의 경영자 마이클 조던은 역사상 최초의 고등학교 출신 1순위 선수인 콰미 브라운을 선택했습니다. 이 결정에는 조던 개인의 의중이 크게 반영되었습니다. 그는 브라운의 워크아웃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특히 “저를 뽑아주신다면 절대 후회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라는 브라운의 당돌한 선언에 마음이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브라운의 커리어는 결코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그는 NBA 역사상 최악의 ‘먹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조던 자신도 후회하는 결정이 되었습니다.  

조던의 브라운 선택은 그의 오만이 빚은 결과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가 경영자로서 내린 첫 번째 중대한 결정에서, 그는 선수의 다듬어지지 않은 잠재력과 그것을 자신이 직접 조련할 수 있다는 능력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이 실패는 고등학교 선수 지명의 위험성, 가장 위대한 농구인조차 스카우팅에서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전설에게 선택된 십 대 선수가 짊어져야 하는 엄청난 압박감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3.2 국제적인 물결의 도래

브라운이 부진하는 동안, 2001년 드래프트 클래스는 리그를 바꿀 국제적인 재능의 물결을 선보였습니다. 스페인 출신의 파우 가솔은 3순위로 지명되어 즉시 리그에 충격을 주었고,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며 유럽 선수가 첫날부터 프랜차이즈의 주축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의 성공은 야오밍과 같은 미래의 상위 순번 국제 선수들에게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드래프트 후반부인 28순위에서는 샌안토니오 스퍼스가 무명에 가까웠던 프랑스 출신 포인트가드 토니 파커를 지명했고, 그는 훗날 파이널 MVP이자 네 번의 우승을 이끈 핵심 멤버가 되었습니다.  

2001년 드래프트는 스카우팅 철학에 대한 전 세계적인 재검토를 촉발시킨 중요한 변곡점이었습니다. 당시 드래프트 상위권은 ‘제2의 케빈 가넷’을 찾으려는 유행에 따라 콰미 브라운, 타이슨 챈들러, 에디 커리와 같은 미국 고등학교 출신 빅맨들이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이 드래프트에서 배출된 두 명의 미래 명예의 전당 헌액자, 가솔과 파커는 모두 유럽 프로 리그에서 검증된 선수들이었고, 고등학교 유망주들이 갖지 못한 노련함과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가솔의 즉각적인 성공과 파커의 장기적인 왕조 건설은, 미국 고등학교 선수들의 원석 같은 운동 능력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던 당시 NBA 스카우팅의 집단적 사고방식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되었습니다. 이는 각 팀이 국제 스카우팅에 더 많은 투자를 하도록 강제했고, NBA의 국제화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3 드래프트 데이의 ‘만약’: 보스턴의 실수

보스턴 셀틱스는 21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고, 토니 파커를 지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파커에게 셀틱스 모자를 건네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당시 83세였던 셀틱스의 전설적인 회장 레드 아워백이 실무진의 의견을 뒤집고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UNC 출신 가드 조 포르테를 지명할 것을 고집했습니다. 포르테는 보스턴에서 단 8경기를 뛰는 데 그쳤고, 반면 파커는 라이벌 팀인 스퍼스로 가서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이 일화는 단순한 드래프트 실수를 넘어, 과거의 유산이 현재의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의 함정을 보여주는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한 프랜차이즈의 실수가 어떻게 다른 프랜차이즈의 왕조 건설로 이어졌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며,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만약’의 순간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4부: 베테랑들의 이동: 마지막 장과 전략적 보강

이 장에서는 기존 스타 선수들의 중요한 이동을 다루며, 우승을 향한 마지막 도전, 감동적인 복귀, 그리고 90년대 아이콘들의 쓸쓸한 마지막 시즌이라는 주제를 조명합니다.

4.1 한 시대의 종말: 하킴의 캐나다 시절

휴스턴 로키츠에서 17시즌을 보내며 두 번의 우승을 차지한 하킴 올라주원은 2001년 8월 2일, 토론토 랩터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이 이적은 계약 분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올라주원은 로키츠가 제시한 3년 1,300만 달러 제안을 거절하고, 랩터스와 3년 1,800만 달러 규모의 사인 앤 트레이드 계약에 합의했습니다. 그는 빈스 카터를 중심으로 떠오르던 팀이었던 랩터스가 저물어가는 뉴욕 닉스보다 우승에 도전할 마지막 기회를 더 잘 제공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The Dream’이 랩터스 유니폼을 입은 모습은 NBA 팬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는 90년대에 팽배했던 프랜차이즈에 대한 충성심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으며, 가장 상징적인 선수와 팀의 관계조차 비즈니스 논리 앞에서는 끝날 수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보여주었습니다.

4.2 다른 유니폼을 입은 전설들

2001년 오프시즌에는 다른 90년대 전설들도 커리어 후반의 중요한 이동을 감행했습니다. 시애틀에서 한 시즌을 보낸 패트릭 유잉은 마지막 시즌을 위해 올랜도 매직과 계약했습니다. 첫 우승을 갈망하던 명슈터 미치 리치먼드는 디펜딩 챔피언 레이커스와 계약하여 제한된 역할 속에서도 반지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편, ‘Thunder’ 댄 마얼리는 피닉스 선즈로 돌아와 마지막 시즌을 보내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한 세대의 스타들이 선수로서의 황혼기를 마주하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주었습니다. 리치먼드처럼 성공적인 우승 도전으로 마무리한 경우도 있었고, 유잉처럼 전설적인 커리어를 조용히 마감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4.3 전략적 보강

몇몇 다른 주요 선수 이동은 우승 경쟁팀들의 전력을 강화하거나 팬들에게 익숙한 얼굴을 새로운 곳으로 이끌었습니다. 샌안토니오 스퍼스는 포틀랜드로부터 올스타 가드 스티브 스미스를 영입하여 핵심 전력에 중요한 베테랑 득점원을 추가했습니다.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는 조 스미스와 재계약했는데, 이는 과거 스미스와의 불법 이면 계약으로 인해 여러 장의 1라운드 드래프트 지명권을 박탈당했던 스캔들 이후의 재결합이라 더욱 주목받았습니다. 터프가이 찰스 오클리는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시카고 불스로 돌아와 친정팀 복귀를 알렸습니다.  

이러한 거래들은 스퍼스와 같은 우승 후보들이 정상을 지키기 위해 영리한 움직임을 보이는 한편, 다른 팀들은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거나 역사의 한 조각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등, 끊임없이 변화하는 리그의 역동성을 잘 보여줍니다.


결론: 새로운 밀레니엄의 씨앗

2001년 여름은 단순한 과도기가 아니라, NBA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한 시기였습니다. 마이클 조던의 복귀는 선수의 역할을 문화적, 경제적 주체로 재정의했습니다. 키드와 마버리의 트레이드는 순수한 개인 기록보다 승리에 미치는 영향력을 우선시하는 선수 평가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최고의 교본이 되었습니다. 2001년 드래프트는 전 세계 재능 있는 선수들에게 리그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NBA의 구성을 영원히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하킴 올라주원과 패트릭 유잉 같은 전설들이 낯선 유니폼을 입은 모습은 90년대 농구 시대의 완전한 종언을 고하는 신호였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와 거래들이 한데 모여 NBA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전략적이고, 세계적이며, 선수가 주도하는 리그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