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arolingian Dawn: The Era of Pepin III
유럽역사 - 중세유럽역사

피핀 3세의 시대: 새로운 유럽 질서의 서막 (4)

제4부 더 넓은 유럽의 무대

피핀 3세의 통치기에 일어난 변화는 프랑크 왕국과 이탈리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동시대에 이슬람 세계와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도 중대한 지정학적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이는 프랑크 왕국의 대외 정책과 유럽 전체의 세력 균형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제10장 새로운 칼리파국, 새로운 토후국: 이슬람 세계의 전환

압바스 혁명 (750)

750년, 압바스 가문이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칼리파국을 전복시키고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새로운 칼리파국을 세운 사건은 이슬람 세계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압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가문에 대한 체계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이 혁명으로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중심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메소포타미아의 바그다드로 이동했다.  

매의 비상: 압드 알 라흐만 1세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우마이야 왕족이 바로 압드 알 라흐만 1세였다. 그는 우마이야 칼리프의 손자로서, 극적인 탈출 끝에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슬람 세계의 서쪽 끝인 이베리아 반도에 도달했다.  

코르도바 토후국의 건국 (756)

압드 알 라흐만은 755년 이베리아에 상륙하여, 우마이야 왕조에 충성심을 간직하고 있던 시리아 출신 아랍 군대의 지지를 규합했다. 그는 기존의 총독 유수프 알 피흐리를 격파하고 756년 코르도바를 수도로 독립적인 토후국을 선포했다. 이는 압바스 칼리파국으로부터 분리된 최초의 주요 독립 국가였다.  

통합과 갈등

압드 알 라흐만은 남은 통치 기간 동안 내부의 반란(사라고사 등)과 외부의 위협, 즉 압바스 왕조의 침공(763) 및 프랑크 왕국의 개입에 맞서 싸우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750년에서 756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두 거대 제국의 정치적 통일성을 동시에 무너뜨렸다. 로마 제국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최종적인 결별로 분열되었고, 이슬람 칼리파국은 코르도바와 바그다드의 분리로 양분되었다. 이로써 피핀의 시대는 프랑크 왕국과 단일한 칼리파국이 대치하는 양극 체제가 아니라, 다극화된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제 프랑크 왕국은 남쪽 국경에서 독립적이고 적대적인 우마이야 국가와 마주하게 되었고, 동시에 이들과 공동의 적인 압바스 왕조나 비잔티움 제국과 외교적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선택지를 갖게 되었다. 이 새로운 현실은 프랑크의 외교 정책을 직접적으로 형성했다. 피핀이 752년부터 759년까지 벌인 셉티마니아 정복 전쟁은 단순히 ‘무어인’을 밀어내는 것을 넘어, 알안달루스의 정치적 분열을 이용하여 남부 국경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계산의 결과였다. 따라서 756년 코르도바 토후국의 건국은 같은 해의 ‘피핀의 기증’만큼이나 유럽의 미래에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는 알안달루스라는 독특한 정치·문화적 실체를 탄생시켰고, 이후 수 세기 동안 이어질 프랑크, 스페인 우마이야, 그리고 북부 기독교 왕국들 간의 복잡한 삼각관계의 무대를 마련했다.  

제11장 해협 너머의 시선: 머시아 패권기

머시아의 부상

같은 시기, 영국 해협 건너편의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는 머시아(Mercia) 왕국이 7왕국(Heptarchy)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8세기는 ‘머시아 패권기'(Mercian Supremacy)로 알려져 있다. 애설발드(Æthelbald, 716-757)와 오파(Offa, 757-796)와 같은 강력한 왕들의 통치 아래, 머시아는 켄트, 서식스, 그리고 떠오르는 강자였던 웨식스까지 포함한 잉글랜드 남부 왕국들에 대한 헤게모니를 확립했다.  

병행적인 국가 건설

주목할 점은 머시아와 카롤링거 왕들이 구사한 통치 방식에 현저한 유사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머시아 왕들 역시 카롤링거 군주들처럼 교회 회의, 법전 편찬(오파의 법전은 소실됨), 그리고 군사력을 동원하여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키고 자신들의 권위 아래 여러 민족을 통합하려 했다. 특히 오파는 자신의 아들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로 삼는 의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신성한 왕권을 표방하는 카롤링거의 새로운 모델을 채택한 것이었다.  

프랑크 왕국과의 외교 및 교역

북유럽에서 두 강대국이 동시에 부상하면서, 이들 사이에는 직접적인 외교 및 경제 관계가 수립되었다. 피핀과 노섬브리아의 에아드베르트 왕 사이에 우호 관계와 선물 교환이 있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후 샤를마뉴와 오파의 시대에 이르면, 양국의 관계는 때로는 긴장감이 흘렀지만 서로를 대등한 상대로 인정하는 공식적인 외교 관계로 발전했다. 이 관계에는 연마용 흑석이나 직물 같은 상품 교역이 포함되었으며, 샤를마뉴가 오파에게 보낸 서신이 현존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두 통치자는 심지어 화폐 개혁에서도 서로 협력했다.  

수 세기 동안 서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축으로 하는 지중해 세계였다. 그러나 카롤링거와 머시아가 동시에 패권 국가로 부상한 것은 이 중심축이 북쪽으로, 즉 루아르 강과 라인 강 사이의 지역 및 영국 해협 건너 잉글랜드로 결정적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이들 ‘야만’ 왕국들은 더 이상 로마 세계의 변방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정교한 통치 체제를 발전시키고, 장거리 교역에 참여하며, 비잔티움이나 압바스 같은 오래된 제국들과 대등한 조건으로 외교를 펼치는 새로운 핵심 세력이 되었다. 피핀/샤를마뉴와 오파의 관계는 문명화된 중심부와 야만적인 주변부의 관계가 아니라, 두 동급 강대국 간의 협상이었다. 따라서 피핀의 통치는 지중해의 권력 투쟁이라는 맥락뿐만 아니라, 훗날 중세 서유럽을 규정하게 될 새로운 북유럽 정치·경제권이 부상하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결론: 피핀 시대의 유산과 카롤링거 시대의 서막

751년에서 768년 사이, 유럽의 정치 지도와 이념적 토대는 돌이킬 수 없이 변화했다. 피핀 3세의 통치기는 로마 제국의 오랜 잔영이 사라지고, 교황권과 프랑크 왕권이 결합한 새로운 기독교 세계가 탄생하는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에서는 교황령이 탄생하여 교황이 세속 군주가 되었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우마이야 왕조가 부활하여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통일성이 깨졌으며, 북쪽에서는 프랑크와 머시아가 새로운 패권 국가로 부상했다.

샤를마뉴라는 이름이 카롤링거 제국의 대명사처럼 여겨지지만, 그의 위대한 업적은 아버지 피핀이 닦아놓은 견고한 토대 없이는 불가능했다. 피핀의 유산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왕위 확보: 그는 아버지 샤를 마르텔이 갖지 못했던 법적 정통성, 즉 ‘왕’이라는 칭호를 확보하여 카롤링거 통치의 기반을 다졌다.
  2. 교황-프랑크 동맹 구축: 그는 카롤링거 제국의 이념적, 정치적 반석이 된 교황청과의 동맹을 구축했다.
  3. 교황령 창설: 그는 이탈리아를 프랑크의 보호령으로 편입시키고 로마 문제에 대한 영구적인 개입권을 확보함으로써 제국의 남방 전선을 안정시켰다.
  4. 왕국 통합: 그는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프랑크 왕국을 통합하고 외부의 위협을 제거하여, 아들에게 더 큰 팽창을 위한 강력하고 통일된 국가를 물려주었다.

종종 위대한 아버지와 더 위대한 아들의 그늘에 가려지지만, 피핀 3세는 8세기 역사의 진정한 중심축이었다. 그는 무력에 기반한 왕국을 물려받아 신의 은총에 기반한 제국을 유산으로 남겼으며, 새로운 서방 기독교 세계의 탄생을 위한 무대를 완벽하게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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