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 중반, 유럽 역사의 분수령
8세기 중반, 특히 피핀 3세(Pepin the Short)의 통치기(751-768)는 유럽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룬 시기이다. 이 시기는 단순히 프랑크 왕국의 왕조 교체를 넘어, 고대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지속되던 정치 질서가 최종적으로 붕괴하고 새로운 세력 구도가 형성되는 분수령이었다. 서유럽에서는 교황의 신성한 권위를 등에 업은 프랑크 군주정, 세속적 영토를 지닌 교황권,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 새롭게 재편된 이슬람 국가라는 삼각 구도가 명확하게 자리를 잡았다.
본 보고서는 피핀 3세의 통치가 단순한 프랑크 내부의 사건이 아니라, 서유럽 전역에 걸친 지정학적, 종교적, 이념적 재편을 촉발한 핵심 동력이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개인적 야망과 지정학적 필연성이 결합된 그의 행동은 교황령(Papal States) 창설을 직접적으로 이끌었고, 중세 시대를 규정하게 될 세속 권력과 영적 권위의 동맹을 공고히 했으며, 그의 아들 샤를마뉴(Charlemagne)가 이룩할 제국적 위업의 필수 불가결한 토대를 마련했다. 피핀의 시대는 고대의 잔재가 사라지고 중세 유럽의 지정학적, 이념적 지도가 새롭게 그려지는 역동적인 현장이었다.
이 복잡하고 동시 다발적인 변화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당시 유럽의 주요 세력권에서 일어난 핵심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아래의 표는 각 지역의 역사가 어떻게 서로 맞물려 새로운 시대를 열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줄 것이다.
주요 사건 연표 (741-774)
| 연도 | 프랑크 왕국 | 이탈리아 (교황령 & 랑고바르드) | 비잔티움 제국 | 이베리아 반도 (알안달루스) |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
| 741 | 샤를 마르텔 사망. 피핀과 카를로만 권력 분할. | 교황 자카리아스 즉위. | 콘스탄티누스 5세 통치 시작. | 머시아 왕 애설발드 통치기. | |
| 743 | 피핀과 카를로만, 힐데리히 3세를 왕으로 옹립. | ||||
| 747 | 카를로만, 수도원으로 은퇴. 피핀, 단독 통치자 등극. | ||||
| 749 | 랑고바르드 왕 아이스툴프 즉위. | ||||
| 750 | 피핀, 교황 자카리아스에게 왕위 찬탈의 정당성 문의. | 압바스 혁명. | 우마이야 칼리파국 멸망. | ||
| 751 | 피핀, 힐데리히 3세 폐위 후 수아송에서 왕으로 선출 및 도유. | 아이스툴프, 라벤나 점령. | |||
| 752 | 교황 스테파노 2세 즉위. | ||||
| 753 | 교황 스테파노 2세,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 왕국으로. | ||||
| 754 | 교황 스테파노 2세, 생드니에서 피핀과 아들들에게 재차 도유. | 퀴에르시 약속. | 히에리아 공의회, 성상 숭배 비난. | ||
| 755 | 피핀, 1차 이탈리아 원정. | 압드 알 라흐만 1세, 이베리아 상륙. | |||
| 756 | 피핀, 2차 이탈리아 원정. | ‘피핀의 기증’으로 교황령 탄생. | 코르도바 토후국 건국. | ||
| 757 | 랑고바르드 왕 데시데리우스 즉위. 교황 바오로 1세 즉위. | 머시아 왕 오파 즉위. | |||
| 759 | 피핀, 셉티마니아의 나르본 정복. | ||||
| 763 | 압바스 왕조의 침공 격퇴. | ||||
| 768 | 피핀 3세 사망. 샤를과 카를로만 왕국 분할 상속. | ||||
| 771 | 카를로만 사망. 샤를(샤를마뉴)이 단독 왕이 됨. | ||||
| 772 | 데시데리우스, 로마 위협. | ||||
| 774 | 샤를마뉴, 랑고바르드 왕국 정복. | 랑고바르드 왕국 멸망. |
제1부 프랑크 왕국: 궁재에서 왕으로
제1장 메로빙거 왕조의 황혼: 제도적 부검
8세기 중반 피핀 3세의 쿠데타는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한 세기 이상 진행된 메로빙거 왕조의 구조적 쇠퇴 과정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왕권의 약화는 단순히 무능한 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왕국의 통치 시스템 자체가 붕괴하는 과정이었다.
허울뿐인 왕관
메로빙거 왕조의 권력 기반은 장기간에 걸친 제도적 침식으로 인해 속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잦은 내전과 대외 전쟁은 왕실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왕의 권위를 약화시킨 반면, 군사적 지원의 대가로 막대한 양보를 얻어낸 귀족 세력은 날로 강성해졌다. 왕의 권력은 토지, 칭호, 행정권의 형태로 유력 백작(comites)과 공작(duces)들에게 ‘분할’되었고, 이로 인해 왕국은 점차 지방 분권화되었다. 결국 왕은 수많은 대귀족 중 가장 명망 있는 한 사람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했으며, 실질적인 통치 기반을 상실했다.
궁재(Maiores Palatii)의 부상
이러한 권력 공백을 파고든 것이 바로 궁재, 즉 ‘궁전의 시장(Mayor of the Palace)’이라는 직책이었다. 본래 왕실의 가사를 총괄하는 행정관에 불과했던 이 직위는 점차 왕국의 섭정이자 총독의 지위로 격상되었다. 특히 아르눌핑-피핀 가문(훗날의 카롤링거 가문)은 이 궁재직을 세습화하며 왕국의 실권을 체계적으로 장악해 나갔다. 그들은 왕의 이름으로 군대를 지휘하고, 행정을 총괄하며, 교회의 막대한 토지를 관리함으로써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무대 뒤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샤를 마르텔(714-741)의 유산
피핀 3세의 아버지인 샤를 마르텔은 궁재직을 국가 최고 권력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로, 아들의 왕위 등극을 위한 모든 실질적인 기반을 닦았다. 그는 프랑크 왕국의 군 통수권자이자 최고 행정관으로서 ‘프랑크족의 공작 겸 제후'(dux et princeps Francorum) 칭호를 사용하며 무자비할 정도의 효율성으로 왕국을 통치했다. 특히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를 격파한 것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그를 ‘기독교 세계의 구원자’라는 상징적 지위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통치 말년에 메로빙거 왕을 옹립하지 않은 채로 왕국을 다스렸는데, 이는 왕이라는 직위가 기능적으로 완전히 불필요해졌음을 공공연히 드러낸 행위였다.
‘무위의 왕’이라는 정치적 도구
이러한 배경에서 마지막 메로빙거 왕 힐데리히 3세의 짧은 치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743년, 피핀과 그의 형 카를로만은 힐데리히 3세를 왕위에 앉혔다. 이는 권력의 후퇴가 아니라, 왕국의 변방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고대 왕조의 상징적 정통성을 잠시 이용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술수였다. 힐데리히 3세는 “왕이라는 칭호만 가졌을 뿐 아무런 권력도 없는” 존재였으며, 실권은 전적으로 궁재 형제가 행사했다.
이처럼 한 세기에 걸쳐 진행된 권력 이동의 과정을 살펴보면, 피핀의 751년 쿠데타는 혁명의 시작이 아니라 오랜 과정의 마침표였음을 알 수 있다. 메로빙거 왕조의 통치 체제는 강력한 귀족층에 의존하는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스스로 붕괴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카롤링거 가문은 단순히 권력을 찬탈한 것이 아니라, 궁재직이라는 국가의 핵심 ‘제도’를 장악하여 군사, 행정, 교회 자원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획득했다. 샤를 마르텔의 통치기에 이르러 궁재의 사실상의 권력(de facto)은 국왕의 법적인 권위(de jure)를 완전히 압도했다. 따라서 751년 피핀의 행동은 새로운 혁명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이미 한 세대 전부터 굳어진 정치적 현실에 ‘왕’이라는 칭호를 일치시킨, 지극히 논리적인 귀결이었다. 그는 권력의 실체(potestas)와 칭호(rex) 사이의 괴리를 해소했을 뿐이다.
제2장 751년의 쿠데타: 신의 이름으로 승인된 혁명
751년, 피핀은 마침내 허울뿐인 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300년간 이어진 메로빙거 왕조의 전통을 깨기 위해서는 프랑크 귀족들을 넘어설 수 있는 초월적인 권위가 필요했다. 그는 그 해답을 로마의 교황에게서 찾았다.
교황 자카리아스에게 보낸 질문
750년, 피핀은 교황 자카리아스에게 사절을 보내 역사에 길이 남을 질문을 던졌다: “권력을 가지지 못한 통치자가 계속해서 ‘왕’이라 불리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이는 즉흥적인 질문이 아니라, 교황의 승인을 통해 자신의 찬탈을 정당화하려는 “세심하게 연출된 각본”이었다. 당시 교황청은 이탈리아를 위협하는 랑고바르드족 때문에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강력한 군사적 동맹이 필요했던 교황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실질적인 권력을 가진 자가 왕으로 불리는 것이 더 낫다”고 화답했다.
힐데리히 3세의 폐위
교황의 답변은 피핀에게 행동의 명분을 주었다. 751년 11월, 힐데리히 3세는 공식적으로 폐위되었다. 그의 긴 머리카락을 자르는 의식은 메로빙거 왕권과 남성성의 강력한 상징을 제거하는 공개적인 정치적 거세 행위였다. 그는 그의 아들과 함께 수도원으로 보내졌는데, 이는 당시 정적을 제거하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이로써 메로빙거 왕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했다.
수아송에서의 선출과 첫 번째 도유
새로운 카롤링거 왕조는 옛 전통과 새로운 의례의 결합을 통해 탄생했다. 피핀은 고대 게르만 관습에 따라 “프랑크 지도자들의 회의”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는 그의 군대 대부분이 참석했는데, 이는 교황의 결정에 불복할 가능성이 있는 귀족들에게 보내는 명백한 경고였다. 선출 직후,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의식이 거행되었다. 마인츠의 대주교 보니파키우스가 피핀의 머리에 성유(聖油)를 바르는 도유식(anointing)을 집전한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한 왕위 교체를 넘어, 왕권의 정통성 개념 자체를 뒤바꾼 이념적 혁명이었다. 메로빙거 왕조의 정통성은 신성한 혈통과 가문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찬탈자인 피핀은 이러한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는 귀족들의 선출이라는 프랑크 관습을 따랐지만, 300년 역사의 왕조에 맞서기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때 피핀은 보니파키우스 대주교나 잘츠부르크의 베르길리우스 같은 성직자들의 조언에 따라 , 성서와 아일랜드 교회의 전통에서 유래한 왕의 도유식을 도입했다. 이 행위는 왕권의 기반을 혈통에서 신의 승인으로 근본적으로 전환시켰다. 이제 왕은 단순히 신성한 가문의 후손이 아니라, “신의 은총으로 즉위한 왕”(rex Dei gratia)이 된 것이다. 따라서 751년의 쿠데타는 통치자의 교체가 아니라, 피핀과 교황청이 합작하여 교회를 파트너로 하는 새로운 기독교적 왕권 모델을 창조한 심대한 이념적 혁명이었다. 이 새로운 모델은 이후 천 년간 유럽의 정치 사상을 지배하게 된다.
제3장 새로운 왕의 통치와 권력 강화 (751-768)
왕위에 오른 피핀은 곧바로 왕국의 통합과 국경 안보를 위한 대대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통치는 교회와의 긴밀한 협력, 끊임없는 군사 활동, 그리고 후대 카롤링거 행정의 기틀을 닦은 개혁으로 특징지어진다.
교회 개혁과 동맹
피핀의 통치는 정교(政敎) 분리가 무의미할 정도로 교회와 국가가 깊이 통합된 형태를 띠었다. 그는 아버지 샤를 마르텔과 앵글로색슨 선교사 성 보니파키우스가 시작한 프랑크 교회 개혁을 계승했다. 그는 교회 회의(synod)를 소집하고, 대주교구를 신설했으며, 작센족과 같은 이교도 부족에 대한 선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이는 단순한 신앙심의 발로가 아니었다. 교회의 행정 조직망을 이용해 왕권을 왕국 구석구석까지 투사하려는 고도의 통치 전략이었다.
군사적 통합
피핀의 치세는 왕국을 통일하고 국경을 확보하기 위한 거의 끊임없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 내부 반란 진압: 그는 왕이 된 직후 이복형제 그리포와 조카 드로고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며 프랑크 왕국의 유일하고 확고한 지배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 아키텐 정복: 그는 반독립 상태였던 아키텐 공국의 바이오파르 공작을 상대로 길고 잔혹한 전쟁을 벌였다. 그의 전술에는 공포를 조장하고, 저택을 불태우며, 포도밭을 파괴하는 초토화 작전이 포함되었으며, 결국 보르도와 툴루즈 같은 주요 거점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 셉티마니아 확보: 그는 759년 나르본을 함락시켜 셉티마니아 지역에 남아있던 마지막 우마이야 주둔군을 몰아내고, 이슬람 세력의 국경을 피레네 산맥 너머로 밀어내는 데 성공하며 아버지의 과업을 완수했다.
- 작센과 바이에른: 그는 북동부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반항적인 작센족과 바이에른족을 상대로 반복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비록 이들의 최종적인 복속은 아들 샤를마뉴의 몫으로 남았지만, 그의 원정은 카롤링거 제국 확장의 서막을 열었다.
행정 및 법률 개혁
샤를마뉴 시대만큼 기록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피핀의 통치는 후대 카롤링거 통치 시스템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프랑크의 입법 체계를 개혁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행정, 법률, 종교 문제에 대한 왕의 칙령인 ‘카피툴라리'(capitulary)는 그가 궁재로 있던 시절부터 활용되었으며 왕이 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768년의 ‘아키텐 카피툴라리’는 그의 치세에 반포된 직접적인 예시다. 또한 그는 화폐 개혁에 착수하여 샤를마뉴가 완성하게 될 표준화된 은화(데나리우스) 제도의 기반을 마련했다. 주목할 만한 조치로, 그는 궁재직 자체를 폐지하고 그 자리를 시종장(chamberlain)으로 대체했는데, 이는 미래의 경쟁자가 자신과 똑같은 제도를 이용해 왕권을 위협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귀족과의 관계
피핀과 프랑크 귀족들의 관계는 회유와 강압을 넘나드는 신중한 균형 잡기였다. 그가 왕으로 선출되기 위해서는 귀족 회의(placitum generalis)의 동의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즉위는 궁재로서의 그에게는 복종했지만, 자신들과 같은 신분에서 왕이 된 그에게는 복종하기를 꺼렸던 일부 귀족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그의 끊임없는 군사 원정은 왕국을 확장하는 목적 외에도, 전사 계급인 귀족들에게 전리품과 토지를 분배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고 불만을 외부로 돌리는 중요한 기능을 했다.
피핀의 국내 정책은 각기 다른 정책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전쟁’과 ‘신앙’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시스템이었다. 아키텐이나 작센으로의 군사적 팽창은 기독교 세계를 수호하고 확장한다는 이념적 명분으로 정당화되었으며, 이는 그의 교회 개혁 목표와 정확히 일치했다. 교회는 주교를 행정가로 활용하고 왕권신수설의 이념적 틀을 제공함으로써 통치의 기반을 다졌고, 군대는 왕권 집행의 수단이자 귀족들에게 보상할 자원(전리품과 토지)을 확보하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군사력, 귀족층의 이해관계, 그리고 교회의 이념을 하나로 융합시킨 이 강력한 시스템이야말로 카롤링거 팽창의 핵심 동력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