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ovingian Decline
유럽역사 - 중세유럽역사

메로베우스 왕조의 몰락과 카롤루스 시대의 서막 (2)

제3부 격동의 대륙: 8세기 지정학의 도가니

메로베우스 왕조의 내부 붕괴는 8세기 유럽을 휩쓴 거대한 지정학적 변화와 맞물려 가속화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남쪽과 남동쪽에서 동시에 닥쳐온 위협에 직면했고, 이는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권력의 등장을 촉진했다.

제3.1장 남쪽의 위협: 우마이야 칼리파국과 갈리아를 향한 진군

711년에서 718년 사이, 우마이야 칼리파국은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을 눈 깜짝할 사이에 정복했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의 남서부 국경에는 강력하고 팽창주의적인 이슬람 국가가 자리 잡게 되었다. 718년경부터 우마이야 군대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셉티마니아와 아키텐 지역을 습격하고 정복했으며, 북쪽으로는 부르고뉴까지 진출했다. 이는 프랑크 왕국에 직접적이고 실존적인 군사 위협이었으며, 의례적인 역할에 갇힌 메로베우스 군주제는 이에 대응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제3.2장 이탈리아의 교착 상태: 교황, 랑고바르드, 그리고 비잔티움의 희미해진 그림자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랑고바르드 왕국이 세력을 통합하며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고, 이는 로마와 교황이 통치하는 영토를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아이스툴프(Aistulf)와 같은 랑고바르드 왕들은 로마를 포위하며 교황청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전통적으로 교황의 보호자였던 비잔티움 제국은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 내에서의 제국의 영향력은 수십 년에 걸쳐 약화된 상태였다. 제국은 동쪽에서 이슬람 칼리파국과의 생존을 건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고 , 내부적으로는 성상 파괴 논쟁(726-843)이라는 극심한 종교적, 정치적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성상 파괴 논쟁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에 심각한 신학적 균열을 만들었고, 이는 두 세력의 정치적 동맹을 더욱 약화시켰다. 랑고바르드족의 위협 앞에 무방비 상태로 남겨진 교황들은 “산 너머 프랑크 왕국을 그들의 세속적 후원자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739년 교황 그레고리오 3세가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보낸 첫 번째 원조 요청은 당시 카롤루스가 랑고바르드와 동맹 관계였기 때문에 무시당했다. 이 실패는 교황청으로 하여금 새로운 외교적, 이념적 전략을 개발하도록 만들었다.  

이 세 가지 지정학적 위기의 수렴은 카롤루스-교황 동맹을 거의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 ‘상호 필요의 삼각관계’를 형성했다. 이는 세 개의 난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었다. 첫째, 프랑크 왕국은 우마이야 칼리파국이라는 거대한 군사적 위협에 직면해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메로베우스 왕이 제공할 수 없는 강력하고 통일된 군사 지도력이 필요했다. 둘째, 교황은 랑고바르드족이라는 군사적 위협에 직면해 있었고, 멀리 있고 혼란스러운 비잔티움 제국이 더 이상 되어줄 수 없는 강력한 보호자가 필요했다. 셋째, 카롤루스 가문의 궁재들은 실질적인(de facto) 최고 권력을 가졌지만, 그리모알트의 실패가 보여주었듯이 왕이 되기 위한 전통적이고 신성한 정당성(de jure)이 부족했다. 이 문제들의 해답은 서로에게 있었다. 카롤루스 가문은 랑고바르드족을 격퇴함으로써 교황의 군사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다. 교황은 그들의 왕위에 신성한 승인을 부여함으로써 카롤루스 가문의 정당성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새롭고 강력하며 정당성을 갖춘 프랑크 왕은 왕국을 통합하여 모든 위협에 맞서 프랑크 왕국의 군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각 당사자는 상대방의 생존과 야망의 열쇠를 쥐고 있었고, 이들의 동맹은 서유럽을 재편할 중대한 사건이 되었다.

제4부 카롤루스 마르텔: 새로운 질서의 망치

제4.1장 통일된 왕국의 단조

카롤루스 마르텔(Charles Martel)은 피핀 2세의 사생아였지만, 그의 운명은 프랑크 왕국의 미래를 결정지었다. 714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그는 잔혹한 내전을 거쳐 경쟁자들을 모두 제압하고 718년까지 유일한 궁재로서 프랑크 왕국을 다시 통일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뛰어난 군사령관이었다. 그의 통치 기간은 프리슬란트인, 작센인, 바이에른인과 같은 외부의 적들과 반항적인 내부 귀족들에 맞선 끊임없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무력을 통해 프랑크인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교회 영지를 몰수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했고, 이를 통해 전문적이고 충성도 높은 군대를 양성했다.  

제4.2장 투르-푸아티에 전투(732년): 신화와 실체

732년, 카롤루스 마르텔의 프랑크 군대는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에서 압드 알 라흐만 알 가피키(Abd al-Rahman al-Ghafiqi)가 이끄는 우마이야 침공군과 마주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기독교 세계를 구한 결정적인 전투로 칭송했지만, 현대의 분석에 따르면 그 즉각적인 전략적 중요성은 다소 과장되었을 수 있다. 이는 대규모 원정대에 대한 중요한 승리였지만, 이슬람 세력의 침공은 그 후로도 수년간 계속되었다.  

투르-푸아티에 전투의 진정한 중요성은 군사 전략적인 측면보다 국내 정치적인 측면에 있었다. 이 전투는 카롤루스 마르텔을 프랑크족의 유일한 수호자이자 진정한 통치자로 각인시킨 기념비적인 선전전의 승리였으며, 이로 인해 메로베우스 왕은 완전히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했다. 이 승리는 그에게 ‘망치’를 의미하는 ‘마르텔루스(Martellus)’라는 별명을 안겨주었고,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왕조가 직면할 수 없었던 위협에 맞서 거둔 이 승리는 왕국의 안보와 미래가 왕이 아닌 궁재의 손에 달려 있음을 가장 공개적인 방식으로 증명했다. 이 압도적인 권위와 명성은 그가 왕 없이 통치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즉, 투르-푸아티에 전투는 메로베우스 군주제의 마법을 심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깨뜨린 사건이었으며, 왕국이 그들 없이도 생존할 뿐만 아니라 번영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제4.3장 공위시대(737-741년): 왕 없는 왕국

737년 메로베우스 왕 테우데리히 4세(Theuderic IV)가 사망하자, 카롤루스 마르텔은 후계자를 임명하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왕좌를 비워둔 채, 생의 마지막 4년 동안 스스로 왕국을 통치했다.  

이 행위는 군주제가 시대에 뒤떨어졌음을 보여주는 궁극적인 증거였다. 프랑크 국가는 왕 없이도 완벽하게 기능했으며, 이는 왕이라는 직책이 이제 텅 빈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그의 아들이 그 허상을 완전히 폐지할 수 있는 마지막 선례를 남겼다.

제5부 751년의 대관식: 동맹으로 벼려낸 왕조

제5.1장 권력에 대한 질문: 피핀의 신의 한 수

카롤루스 마르텔 사후, 그의 아들 피핀 3세(Pepin the Short)와 카를로만(Carloman)이 궁재로서 공동으로 통치했다. 747년 카를로만이 수도원으로 은퇴하자, 피핀은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아버지와 달리, 피핀은 궁재라는 직위에 만족하지 않았다. 750년, 그는 교황 자카리아(Pope Zachary)에게 사절단을 보내 치밀하게 계산된 질문을 던졌다. “왕권을 더 이상 소유하지 않은 프랑크의 왕들에 관하여: 이러한 상태가 올바른 것입니까?”. 이것은 조언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공식적인 정당화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제5.2장 교황의 승인: 새로운 왕권 이론

“랑고바르드족에게 심한 압박을 받고 있던” 교황 자카리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실제 권력을 가진 자가 왕으로 불리는 것이 더 낫다”고 답했다.  

교황의 이 선언은 혁명적이었다. 그것은 게르만족의 전통적인 원칙, 즉 왕의 혈통을 통한 정당성을 신의 승인과 효과적인 통치라는 새로운 신정(神政) 원칙으로 대체했다. 이는 교황이 세속 통치자를 정당화하거나, 나아가 그 정당성을 박탈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선례를 만들었으며, 이 개념은 이후 수 세기 동안 유럽 정치를 지배하게 된다. 메로베우스 왕조의 통치권 주장은 그들의 혈통, 즉 긴 머리카락으로 상징되는 ‘신성한 종족’에 기반을 둔 존재의 원칙이었다. 교황의 답변은 정당성이 권력을 효과적이고 정의롭게 행사하는  

행위에서 나온다는 새로운 원칙을 확립했다. 이 승인을 제공함으로써 교황은 자신을 이 새로운 정당성의 최종 중재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한 영적 지도자가 아니라, 왕을 만드는 자(kingmaker)가 되었다. 교황의 대리인(그리고 나중에는 교황 자신)에 의한 피핀의 도유식은 찬탈이라는 오점을 씻어내고 새로운 왕조에 신성한 권위를 부여하는 강력한 종교 의식이었다. 이 사건은 서유럽 왕권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교회의 권위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제5.3장 한 시대의 종언과 동맹의 탄생

교황의 승인으로 무장한 피핀 3세는 751년 마지막 메로베우스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켰다. 왕조의 통치권을 상징하던 그의 긴 머리카락은 잘렸고, 그는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피핀은 프랑크 귀족 회의에서 왕으로 선출되었고, 751년에 한 번, 그리고 754년에는 교황 스테파노 2세(Pope Stephen II)가 직접 파리를 방문하여 생드니 대성당에서 더욱 성대하게 두 번째 도유식을 거행했다. 교황은 피핀의 아들들인 카롤루스(Charles)와 카를로만(Carloman)에게도 도유를 행하며, 프랑크인들이 그들의 혈통 밖에서 왕을 선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로마인의 파트리키우스(Patrician of the Romans)’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정당성의 대가로 피핀은 약속을 이행했다. 그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랑고바르드족을 격파하고, 정복한 영토(라벤나 총독부)를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 ‘피핀의 기증(Donation of Pepin)’은 교황령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교황을 세속 영토를 소유한 군주로 만들었다. 이로써 다음 시대 유럽 역사를 규정할 프랑크-교황 동맹이 확고하게 맺어졌다.  

결론: 메로베우스의 유산과 카롤루스 시대의 여명

메로베우스 왕조의 몰락은 복합적인 요인들이 얽힌 결과였다. 분할 상속이라는 왕국의 구조적 취약성은 끊임없는 내전을 야기하며 왕권을 내부로부터 갉아먹었다. 이러한 권력의 공백 속에서 카롤루스 가문은 수 세대에 걸친 야망과 탁월한 능력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8세기 유럽을 뒤흔든 우마이야와 랑고바르드라는 외부의 위협,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라는 기회는 마침내 변화를 위한 완벽한 조건을 만들어냈다.

이 왕조 교체는 단순한 궁정 쿠데타를 넘어 서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재편한 사건이었다. 메로베우스 왕조의 몰락과 교황의 승인 아래 이루어진 카롤루스 왕조의 부상은 (비잔티움으로 대표되던) 낡은 로마 세계와의 마지막 정치적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서방에 독립적인 로마-게르만 문명을 탄생시켰다. 프랑크의 군사력과 로마 교회의 권위라는 두 기둥 위에 세워진 이 새로운 질서는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과 중세 유럽의 탄생으로 가는 길을 직접적으로 열었다. 메로베우스 왕들의 긴 머리카락이 잘려나간 자리에,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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