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왕국의 가을은 언제나처럼 스산했다. 센 강변의 낡은 왕궁, 콤피에뉴(Compiègne)의 목조 건물은 삐걱이는 소리로 제 무게를 힘겹게 지탱하고 있었다. 이 소리는 한때 서유럽을 호령했던 메로베우스 왕조의 신음과도 같았다.
궁전 가장 깊숙한 방, 빛바랜 태피스트리가 걸린 곳에 왕국의 주인인 힐데리히 3세(Childeric III)가 앉아 있었다. 그의 존재감은 방안을 채운 먼지보다 희미했다. 사람들은 그를 ‘왕’이라 불렀지만, 그 호칭은 텅 빈 메아리에 불과했다. 그의 유일한 권위의 상징은 어깨 아래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금발의 긴 머리카락이었다. 신성한 시조 메로베크(Merovech)로부터 내려온, 왕족의 피를 증명하는 유일한 증표. 그는 매일 아침 시종들이 정성껏 빗질해주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자신이 여전히 왕임을 스스로에게 확인하곤 했다.
하지만 왕국의 진짜 심장은 이곳 콤피에뉴가 아닌, 수아송(Soissons)이나 파리의 다른 궁전에서 뛰고 있었다. 그곳에는 궁재(宮宰, Mayor of the Palace), 피핀(Pepin)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작은 왕’ 혹은 ‘난쟁이 피핀’이라 불렀다. 그의 키는 작았지만, 그의 야망과 능력은 프랑크 왕국 전체를 덮고도 남을 만큼 거대했다.
힐데리히는 일 년에 한 번, 백성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가 끄는 낡은 수레에 앉아,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행진하는 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였다. 백성들은 무감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저 수레 위의 허수아비가 아니라, 말을 타고 왕국을 종횡무진하며 작센족을 무찌르고 아키텐의 반란을 진압하는 궁재 피핀이라는 사실을.
오늘도 힐데리히는 창밖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이 그의 긴 머리카락을 물들였다. 그는 문득 서늘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저 노을이 자신의 왕조에 드리운 마지막 저녁 빛은 아닐까. 그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이것이 사라지는 순간, 자신도 사라지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의 왕좌 뒤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그림자의 이름은, 피핀이었다.
제1장: 두 개의 망치, 하나의 모루
743년, 레스티讷(Lestines) 근교
“형님, 저들을 보시오. 늑대 떼가 따로 없소.”
카를로만(Carloman)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 언덕 아래 계곡에는 바이에른과 알레만니족의 연합군이 깃발을 나부끼며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크의 종주권을 거부하고 반기를 든 참이었다. 카를로만은 아버지 카롤루스 마르텔(Charles Martel)의 피를 가장 진하게 물려받은 아들이었다. 그의 눈에는 전장의 불꽃이 익숙했고, 그의 손은 검을 쥐는 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그의 곁에 말을 세운 피핀은 동생과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적군의 수나 배치가 아닌, 그들을 하나로 묶은 분노와 그들을 먹여 살리고 있을 보급선을 가늠하고 있었다.
“늑대는 배가 고프면 흩어지는 법이다, 아우야. 저들의 지도자를 먼저 꺾어야 한다. 지도자를 잃은 늑대는 그저 굶주린 개가 될 뿐이지.”
피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카를로만은 그런 형을 신뢰했다. 자신에게 전장을 꿰뚫는 용맹이 있다면, 형에게는 전쟁 전체를 조망하는 지혜가 있었다. 아버지 ‘망치’ 카롤루스는 두 아들에게 자신의 유산을 반씩 나누어 주었다. 카를로만에게는 아우스트라시아를, 피핀에게는 네우스트리아를. 프랑크 왕국이라는 거대한 모루를 두 개의 망치가 함께 두드리는 형국이었다.
전투는 격렬했다. 카를로만이 선봉에 서서 적진을 유린하면, 피핀은 후방에서 군대를 지휘하며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 피와 먼지가 자욱한 전장에서 두 형제는 완벽한 한 쌍이었다. 반란은 성공적으로 진압되었다.
그날 밤,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가 열린 막사 안에서 카를로만은 피로와 회의에 찬 얼굴로 말했다.
“형님, 우리가 흘린 피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킨 이 땅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의 질문은 허공을 맴돌았다. 모두가 답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법적으로 이 왕국의 주인은 콤피에뉴 궁전에서 인형처럼 앉아 있는 힐데리히 3세였다. 두 형제가 수많은 반란을 진압하고 국경을 안정시킨 것도, 결국에는 메로베우스 왕조의 이름 아래 행해진 일이었다.
피핀은 불타는 장작을 바라보며 나직이 대답했다.
“우리가 흘린 피는 프랑크 족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의 주인은… 이 땅을 지킬 힘이 있는 자여야만 하지.”
그의 말에 카를로만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눈빛에는 깊은 고뇌가 서려 있었다. 그는 독실한 신자였다. 신의 대리인인 교황이 인정한 신성한 왕의 혈통을 거역하는 것은 그의 양심에 큰 부담이었다. 그는 형처럼 현실적이지 못했다.
피핀은 그런 동생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왕국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형제의 힘은 하나로 합쳐져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하나의 질문이 싹트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림자를 위해 싸워야 하는가?’
그는 아직 왕이 아니었지만, 왕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왕국을 통치하는 것은 고된 의무였고, 그는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영광과 권위는 텅 빈 껍데기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모루 위에서 쇠를 달구고 망치질을 하는 것은 자신들인데, 완성된 검에 이름을 새기는 자는 따로 있다는 부조리. 피핀은 그 부조리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제2장: 세상의 무게와 신의 부르심
747년, 아우스트라시아
카를로만은 변했다. 지난 몇 년간, 그의 손에 들린 검은 수많은 피를 머금었다. 특히 칸슈타트(Cannstatt)에서 벌어진 알레만니 귀족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은 그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그는 승리했지만, 밤마다 죽어간 자들의 비명에 시달렸다.
그는 이제 전장보다 예배당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형인 피핀이 왕국의 행정과 외교에 몰두하는 동안, 그는 수도원을 찾아다니며 성직자들과 대화하고, 낡은 성경을 읽으며 구원을 갈망했다. 세상의 권력, 피로 얻은 승리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깨닫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카를로만은 피핀을 자신의 거처로 불렀다. 방안에는 화려한 장식 대신 소박한 십자가와 양피지 두루마리들만 놓여 있었다.
“형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피핀은 동생의 얼굴에서 결심을 읽었다. 그것은 전장으로 향하는 전사의 결심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는 자의 평온한 결심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그만두려 합니다.”
“그만두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궁재의 직위를 내려놓고, 로마로 떠나려 합니다. 그곳에서 남은 생을 신을 위해 바칠 것입니다. 수도사가 될 생각입니다.”
피핀은 순간 말을 잃었다. 동생의 신앙심이 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권력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것은 왕국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결정이었다.
“아우야, 진심인가? 지금 왕국은 우리 형제를 필요로 한다. 아직 작센족이 북쪽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고, 아키텐은 여전히 불안하다. 네가 없으면…”
“형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카를로만은 피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형님은 나보다 더 훌륭한 통치자입니다. 당신은 이 땅을 다스릴 지혜와 결단력을 모두 갖추셨습니다. 나는 그저 피를 흘리는 무인이었을 뿐, 내 영혼은 이제 평화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아들 드로고(Drogo)를 형님께 맡기겠습니다. 부디 그 아이를 잘 보살펴 주십시오.”
피핀은 동생의 손을 잡았다. 한때 검을 맞잡고 싸웠던 거칠고 굳은살 박인 손이었다. 이제 그 손은 묵주를 쥐게 될 터였다. 피핀은 동생의 결정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카를로만이 떠나는 날, 피핀은 국경까지 그를 배웅했다. 화려한 궁재의 복장 대신 초라한 순례자의 옷을 입은 카를로만은 말없이 형을 껴안았다.
“프랑크를 부탁합니다, 형님.”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남쪽으로, 로마를 향해 떠났다. 그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피핀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편으로는 유일한 경쟁자이자 동반자였던 동생을 잃은 상실감이, 다른 한편으로는 마침내 왕국 전체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는 해방감이 교차했다.
이제 프랑크 왕국의 망치는 하나만 남았다. 그리고 그 망치를 쥔 피핀의 어깨는 이전보다 훨씬 무거워졌다. 그는 이제 혼자서 왕국 전체를 책임져야 했다. 동시에,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마지막 장애물 하나가 사라졌음을 직감했다. 이제 그와 힐데리히 3세 사이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3장: 로마로 향한 질문
750년, 수아송 궁전
피핀은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통치자였다. 카를로만이 떠난 후, 그는 반대 세력을 모두 제압하고 왕국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는 법령을 발표하고, 세금을 징수했으며, 군대를 지휘하고, 외국의 사절들을 맞이했다. 그는 왕이 하는 모든 일을 하고 있었다. 단지 ‘왕’이라 불리지 않을 뿐이었다.
이 모순이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귀족들은 그의 앞에서는 복종했지만, 뒤에서는 여전히 그를 ‘궁재’라 불렀다. 그의 권력은 그의 개인적인 능력에 기반한 것이었지, 신성한 혈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죽는다면, 그의 아들들이 이 권력을 온전히 물려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또다시 귀족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시작될까?
왕국에 진정한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권력과 명목상의 권위가 일치해야만 했다. 그림자 왕을 폐하고, 진짜 왕이 그 자리에 앉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과거, 그의 먼 친척이었던 그리모알트(Grimoald the Elder)가 메로베우스 왕을 폐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다 귀족들의 반발로 처참하게 실패했던 역사가 있었다. 무력만으로는 부족했다. 프랑크 족의 관습과 전통을 뛰어넘을,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정당성’이 필요했다.
고민에 빠져 있던 피핀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이탈리아에서 랑고바르드 족의 압박에 시달리던 교황 자카리아(Pope Zachary)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내온 것이었다. 교황은 랑고바르드 왕국의 위협 앞에서 자신을 지켜줄 강력한 세속 군주를 절실히 원하고 있었다. 동쪽의 비잔티움 제국은 성상 파괴 문제로 로마와 대립하고 있었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교황에게 유일한 희망은 ‘산 너머’의 강력한 프랑크 왕국뿐이었다.
피핀은 이 기회에서 자신의 오랜 고민을 해결할 열쇠를 발견했다. 그는 군사적 보호를 필요로 하는 교황과, 신성한 정당성을 필요로 하는 자신. 서로가 가진 것을 교환할 수 있는 완벽한 거래였다.
그는 가장 신뢰하는 두 명의 측근, 생드니 수도원의 원장 풀라드(Fulrad)와 주교 부르하르트(Burchard)를 불렀다.
“그대들을 로마로 보낼 것이다. 교황 성하를 알현하고, 나의 질문을 전하라.”
풀라드가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어떤 질문을 전할까요, 전하?”
피핀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서유럽의 미래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에 무게를 실어 말했다.
“이렇게 여쭈어라. ‘프랑크 왕국에는 왕의 칭호만 있고 아무런 실권이 없는 왕이 있는데, 이러한 상태가 과연 옳은 것입니까?(…interrogando de regibus Francorum, qui illo tempore fuerunt et regalem potestatem non habuerunt, si bene fuisset an non.)’“
그것은 신의 한 수였다.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사실상 승인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조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려는 일에 대한 신학적, 도덕적 명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교황에게 선택지를 주었다. 자신을 지지하고 강력한 동맹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낡은 전통에 얽매여 랑고바르드 족의 칼날 아래 스러질 것인가.
풀라드와 부르하르트는 피핀의 의도를 즉시 파악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깨에 프랑크 왕국의 미래가 걸려 있음을 알았다. 며칠 후, 두 명의 사절은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향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그들의 행보에 한 왕조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제4장: 성 베드로의 답장
751년 초, 로마 라테라노 궁전
교황 자카리아는 창백한 얼굴로 라테라노 궁전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로마의 성벽 아래, 랑고바르드 왕 아이스툴프(Aistulf)의 군대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시를 감돌고 있었다. 교황은 영적인 지도자였지만, 동시에 로마라는 도시와 교황령이라는 영토를 지켜야 하는 세속의 군주이기도 했다. 그는 밤마다 성 베드로의 무덤 앞에서 기도했다. ‘주여, 당신의 교회를 이 야만인들의 손에서 구원하소서.’
바로 그때, 프랑크 왕국의 궁재 피핀이 보낸 사절이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자카리아의 눈이 빛났다. 그는 기도가 응답받았음을 직감했다.
풀라드와 부르하르트는 교황 앞에 엎드려 경의를 표한 뒤, 피핀의 질문을 그대로 전했다. 질문이 끝나자, 궁전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추기경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신성한 왕조를 교회의 권위로 부정하는 것은 혁명적인 일이었고, 그 파장은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교황 자카리아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그는 피핀의 질문 속에 담긴 제안을 정확히 이해했다. 이것은 위기에 처한 교황청을 구할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그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역사가 되었다.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의 질서는 올바르게 유지되어야 하오. 권력 없는 이름은 혼란을 낳을 뿐이며, 이름 없는 권력은 불안을 낳소.”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가장 결정적인 판결을 내렸다.
“실제로 권력을 가진 자가 왕으로 불리는 것이 더 낫소.(Ut melius esset illum regem vocari qui potestatem haberet, quam illum qui sine regali potestate manebat.)“
그 선언이 떨어지는 순간, 풀라드와 부르하르트는 서로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교황으로부터 기대했던 것 이상의 답을 얻었다. 이것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었다. 성 베드로의 후계자가 내린, 신의 뜻을 담은 명령이었다.
교황 자카리아는 덧붙였다. “나의 사도적 권위(apostolic authority)로 명하노니, 피핀을 프랑크 족의 왕으로 삼으라. 그리하여 혼란이 종식되고 질서가 바로 서게 하라.”
이로써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게르만 족의 전통이었던 ‘혈통의 원칙’은 교황의 선언 아래 ‘효과적인 통치의 원칙’으로 대체되었다. 교황은 스스로를 세속 군주의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박탈할 수 있는 ‘왕을 만드는 자(kingmaker)’로 자리매김했다.
며칠 후, 풀라드와 부르하르트는 교황의 공식적인 답신을 품에 안고 프랑크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발걸음은 올 때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들은 단순히 교황의 편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를 열라는 신의 허락을 가지고 가는 길이었다.
제5장: 머리카락이 잘리던 날
교황의 답신이 수아송에 도착하자, 피핀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프랑크 귀족 회의를 소집했다. 교황의 이름으로 내려진 신성한 명령 앞에서, 메로베우스 왕조의 전통을 고수하던 귀족들조차 감히 반대 의견을 내지 못했다. 회의는 피핀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는 것으로 만장일치로 결론이 났다.
이제 마지막 절차가 남았다. 낡은 시대를 끝내는 의식.
피핀은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콤피에뉴 궁전으로 향했다. 왕의 방문 소식에도 궁전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힐데리히 3세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자신의 방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그의 삶과 왕조의 유일한 자부심이었던 긴 머리카락을 손질하기 위한 빗과 향유가 놓여 있었다.
피핀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왕관도, 화려한 갑옷도 입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힐데리히 앞에 섰다. 힐데리히는 고개를 들어 피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공포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깊은 슬픔과 피로감만이 어려 있었다.
“때가 되었는가, 궁재?”
힐데리히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피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신호를 보냈다. 시종 하나가 은쟁반 위에 놓인 날카로운 가위를 들고 다가왔다.
‘싹둑.’
가위가 힐데리히의 금발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단순히 머리카락이 잘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3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한 왕조의 역사가 끊어지는 소리였다. 잘려나간 머리카락 다발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지막 권위의 상징을 잃어버린 힐데리히는 이제 그저 평범한 남자가 되었다. 그는 텅 빈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과거를 내려다보았다.
피핀은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제 왕이 아니오. 남은 생은 생 베르탱(Saint-Bertin) 수도원에서 신을 섬기며 조용히 보내게 될 것이오. 그곳에서 평안을 찾으시길.”
그것은 자비처럼 들렸지만, 사실상 종신형 선고였다. 삭발당한 왕은 수도원에 감금되었고, 역사 속에서 잊혀 갔다.
같은 해, 751년 11월. 수아송에서 대관식이 열렸다. 프랑크의 모든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피핀은 마인츠의 대주교이자 교황의 대리인이었던 성 보니파시오(Saint Boniface)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보니파시오는 구약의 예언자 사무엘이 사울과 다윗에게 그랬던 것처럼, 피핀의 이마에 신성한 기름을 발랐다.
이 도유식(anointing)은 게르만 전사들의 왕 추대 방식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신이 직접 선택하고 축성한 왕,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왕(Dei gratia rex)’이 탄생했음을 의미했다. 피핀의 찬탈은 이제 신성한 행위가 되었다.
왕관을 쓴 피핀이 일어서자, 귀족들은 일제히 외쳤다.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Vivat Rex!)”
메로베우스의 시대는 저물고, 카롤루스 왕조의 시대가 밝아오고 있었다. 피핀은 이제 왕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왕관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그의 시선은 알프스 너머, 자신에게 왕관을 허락한 교황과 그를 위협하는 랑고바르드 족을 향하고 있었다. 새로운 왕의 첫 번째 임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필로그: 새로운 시대의 서막
피핀 3세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두 번이나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랑고바르드 족을 격파했다. 그리고 정복한 이탈리아의 영토, 라벤나 총독부를 교황에게 기증했다. 이 ‘피핀의 기증’은 교황령의 시작이 되었고, 교황을 세속의 군주로 만들었다. 이로써 프랑크 왕권과 로마 교황권의 신성한 동맹은 피로써 굳건해졌다.
피핀의 왕좌는 그의 아들에게로 온전히 계승되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쌓아 올렸다. 그는 서유럽 대부분을 통일하고, 800년 크리스마스에 로마에서 교황의 손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카롤루스(Charles)였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대제’, 즉 샤를마뉴(Charlemagne)라 불렀다.
메로베우스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의 잘린 머리카락 위로, 중세 유럽을 규정할 새로운 제국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